가지 않은 길을 걷다. 대나무 재배 강태욱씨

가지 않은 길을 걷다. 대나무 재배 강태욱씨

[산림]

5월의 대나무숲을 거닐어본 적이 있는가. 쭉쭉 뻗은 대나무 사이로 파란 하늘이 아른거리고, 쉬익 하는 바람 소리는 가슴속을 파고든다. 이런 대나무 숲을 1년 내내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다. 경남 사천에서 대나무 체험농장 ‘대밭고을’을 운영하는 강태욱 씨(45). 천대받던 대나무를 가공식품에 도입하고 농촌관광 소재로 개발한 임업인이다. ‘한량’과의 첫 만남 취재 일정을 잡기 위해 전화한 건 평일 오후였다. 전화 감이 좋지 않았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축령산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평일에 한가로이 축령산이라니, 돈 좀 벌었다고 하더니만 그렇고 그런 ‘농촌 한량’이 아닌가 살짝 의심이 갔다. 물어물어 찾아간 사천시 곤양면의 ‘대밭고을’은 작은 언덕 위에 있었다. 아래에선 만만해 보였는데 정상까지 오르니 제법 숨이 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덕을 헐레벌떡 뛰어올라오는 덩치 큰 젊은 남자가 보였다. 사무실 문을 따러 온 직원인가 했다. “제가 강태욱입니더.” 세수는커녕 양치도 제대로 하지 않은 듯한 몰골에 잠시 놀랐지만, 묻기도 전에 술술 말이 이어진다. “축령산 안 있습니까. 전남 장성에 있는.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하고 축령산 다녀왔거든요. 갔다 와서 책 좀 보다 깜빡 잠들었는데 늦잠을 자버렸네요. 많이 기다린 건 아니죠?” 공부는 뭐고, 학생은 또 뭐란 말인가. 의아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궁금증이 자연스레 풀렸기 때문이다.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는 덩치만큼이나 컸다. 대나무에 ‘꽂힌’ 귀농인 그는 자신을 귀농인이라고 소개했다. 대구에서 대형 마트에 물건을 납품하는 일을 하다 1998년 ‘IMF를 맞고’ 고향(사천)에 잠깐 쉬러 왔던 게 영영 주저앉게 됐다고 했다. 무엇이 그를 주저앉혔을까. 그는 갑자기 아버지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셨어요.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꿈꾸고 농촌교육에 평생 투신하셨지요. 아버진 저보고 공부하란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그냥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놔두셨죠. 그런데 제가 고향에 내려오니 대나무를 해보라고 권하시더라구요.” 중국산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버려지다시피 했던 인근의 대나무 산을 한 번 이용해보라는 말에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고 했다. “원래 대나무는 큰 산에 많아요. 전국 시·군 중에서 죽림(竹林)면적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딘 줄 아세요? 경남 산청입니다. 하동이 그 다음이고, 전남 담양과 구례가 뒤를 잇구요. 이곳 사천은 다섯 번째예요.”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광활한 죽림 속에 분명 새로운 가능성이 잠재해 있을 것이란 생각을 그때 했다고 그는 말했다. 예상은 오래 지나지 않아 사실로 입증됐다. 대나무 수액의 건강기능성에 주목하다 그가 대나무에 대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특히 주목한 것은 수액. 해마다 5~6월쯤이면 대나무에서 수액을 받아 마셨던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수액 얘기가 실릴 법한 옛날 문헌을 뒤지고 각종 전설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접한 게 일본의 ‘다케야마’라는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였다. 아주 오랜 옛날 예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밥을 도통 먹지 않아 부모가 걱정해 물으니 자신은 죽정(대나무 요정)이고 대나무 수액만을 먹는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후 죽정을 기리는 뜻에서 해마다 단오절이면 대나무 수액을 채취해 마시고 발랐다는 전설에 그는 무릎을 쳤다. 수액의 건강기능성을 확신한 그는 수액을 첨가한 간장과 고추장을 만들었다. 또 서울대 천연물연구소 등 관련 기관에 의뢰해 피부 미용과 보습에 탁월하다는 연구결과도 얻었다. 수액 고추장·간장이 소비자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고, 유명 화장품회사인 아모레퍼시픽에서 원료로 고정 납품할 수 있겠느냐는 문의가 들어왔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일이 술술 풀린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1999년까지만 해도 수액이 식품위생법상 식품 원료로 등록돼 있지 않았거든요. 또 수액의 보관기간을 늘리려면 특수 저장법이 필요했는데 당시엔 자문 구할 만한 사람조차 없었어요. 관련 특허까지 냈지만 엄청 고생했어요. 게다가 그 와중에 누군가 제 특허를 몰래 변용해 상품화하는 일도 발생했구요. 속이 많이 상했죠.” 대나무 활용한 체험관광에 눈뜨다 2000년대 들면서 농촌관광에 대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농촌에서 시골스러움을 만끽하려는 도시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이에 발맞춰 각종 프로그램을 앞세운 체험마을이 곳곳에 생겨났다. 그는 대나무를 테마로 한 체험마을 만들기에 앞장섰다. 인근의 비봉내마을 대표를 맡으면서 5만여 그루의 대나무가 밀집한 대나무산에 산책로를 내고 대나무 숯가마, 피리 만들기, 죽순 요리 등 다양한 대나무 체험거리를 개발해 관광상품화했다. 대나무 체험마을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60가구 남짓한 작은 농촌마을에 연간 2만여 명이 북적이자, 취재 인파가 쏟아져 들어왔다. 농협 등에서도 우수 팜스테이마을로 선정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도 단위 체험마을의 모임으로선 처음인 경남체험마을연합회를 결성하면서부터는 여기저기 강의 요청이 쇄도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농촌관광을 바라보는 인식 말예요. 도시민들은 어려운 농촌을 마치 도와주는 듯이, 농촌 주민들도 큰 도움이나 받는 것처럼 여긴다는 거죠. 괜히 거만해져서도 안 되고, 쓸데없이 저자세로 대응해서도 안 됩니다. 왜 아름다운 자연을 팔면서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나요? 자연을 감상하는 권리를 왜 의무처럼 여기나요? 도시와 농촌이 서로 필요한 부분을 주고받는다고 여겨야만이 제대로 된 농촌관광을 즐길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농촌관광 전문가를 꿈꾸다 그는 농촌관광을 설명하는 데 특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농촌관광의 문제점과 대안을 나름의 시각에서 짚어냈다. 지자체에 농촌관광을 전담하는 조직이 생겨난 것도, 한국농촌관광대학이 설치된 것도 자신이 발로 뛴 결과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벌려 놓은 일을 조금씩 줄이고 있습니다. 왜냐구요? 농촌관광에 대해 학문적으로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현장을 다니다보면 경험이 없는 전문가들이 농촌관광을 망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더라구요. 농촌의 정서를 잘 아는 제대로 된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는 현재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전공은 ‘문화경영 및 관광’이다. “사실 어제 축령산에 간 것도 이 때문이에요. 축령산에 편백나무가 많잖아요. 이걸 어떻게 관광자원화 해볼까 하는 게 현장학습의 주제였죠.” 그가 처음에 말했던 공부니, 학생이니 하는 얘기들이 이해가 됐다. 그러면서 그는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게 자신의 특기라고 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농촌관광은 이제 그만두려고 합니다. 대신 저만이 할 수 있는 농촌관광을 만들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문득 미래의 꿈을 얘기하는 강태욱 씨의 부친이 궁금해졌다. “우리 아버지요? 아실런지 모르겠는데, 춘 자, 성 자 쓰세요. 전국농업기술자협회장을 지내셨던. 근데 전 아버지가 누구라고 웬만해선 말하지 않아요. 아버지 후광으로 일어섰다는 얘기를 듣고 싶지 않거든요. 근데 이제는 좀 생각이 달라졌어요. 아버진 제 콤플렉스가 아니라 큰 힘이라고요. 아버지가 없었으면 이 좋은 대나무를 전 평생 모르고 살아왔을 테니까요.” *강태욱 씨 연락처 011-857-4001, *대밭고을 홈페이지 www.bamboo.co.kr *비봉내마을 홈페이지 www.beebong.co.kr

각종 대나무 체험을 하고 있는 아이들

비봉내마을은 농협 팜스테이마을로 지정된 후 전국 우수 마을 중 하나로 선정됐다.